『산경표』는 언제 누가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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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강 댓글 0건 조회 82,871회 작성일 18-07-31 10:42본문
『산경표』는 언제 누가 만들었나?
현 진 상
우리 것에 대한 눈뜸과 자연환경 보전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백두대간에 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요즘 논의하고 있는 백두대간은 『산경표』(山經表)라는 작은 책에 실린 이 땅의 산줄기 분류체계이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줄기 이름이다. 『산경표』는 우리나라의 산이 어디서 시작하여 어디로 흐르다가 어디서 끝나는지를 족보 형식으로 도표화(圖表化)한 책이다.
백두대간과 『산경표』가 점차 널리 알려지고 이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면서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서로 시각과 견해를 달리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산경표』를 언제 누가 만든 것인가 하는 논제 또한 그 중 하나이다. 이 글에서는 이와 관련한 견해를 몇 가지 살펴보고, 『산경표』 및 관련 문헌을 통해 실증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산경표』(山經表)는 『해동도리보』(海東道里譜), 『기봉방역지』(箕封方域誌), 『산리고』(山里攷, 이상 서울대학교 규장각), 『여지편람』(輿地便覽)(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해동산경』(海東山經, 국립중앙도서관)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된 책의 일부로서 {정리표}(程里表, 道里表)와 함께 전해온다. 모두가 한문으로 된 필사본이며, 필자와 연대를 밝히지 않았고 서문이나 발문도 싣지 않고 있다.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가 최성우(崔誠愚) 소장본을 대본(臺本)으로 1913년 2월 단행본으로 간행한 『산경표』(신연활자본)에는 "편찬자는 알 수 없다." 撰者 未考 고 하면서도 서문(해제)에서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여지고](輿地考)를 거론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지지를 가만히 살펴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음을 지적하게 된다. 오직 신경준이 지은 [여지고]의 산경(山經)만이 그 줄기[幹]와 갈래[派]의 내력을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높이 솟아 어느 산을 이루고, 비껴 달리다가 어느 고개에 이르며, 굽이돌아 어느 고을을 둘러싸는지를 상세히 싣지 않은 것이 없기에, 이야말로 산의 조종을 알려 주는 표라 할 만하다. 산경을 바탕[綱]으로 삼고 옆에 이수(里數)를 조목[目]으로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범위와 경계를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 한눈에 알아볼 수 있으니, 원전으로 삼은 산경에 금상첨화일 뿐만 아니라 실로 지리가의 나침반[指南]이 될 만하다 하겠다."( 考東方地志論山者類多 摘拔其尤散亂無統 惟輿地考申景濬所撰 山經直 幹波來歷 高起爲某嶽橫馳爲某嶺 回抱爲某治無不詳載 寔爲導山之祖是表也 以山經爲綱而旁附里數目 而張之全區界境曉然爲指掌 非但爲原經之錦花 實爲地理家之一指南云爾)
위 조선광문회본 『산경표』 서문의 [여지고]는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가리킨다. 조선광문회는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신경준이 저술했다는 것과, 누군가 [여지고]를 보고 『산경표』를 만들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광문회가 그렇게 확신했다는 사실이 '『산경표』의 원전은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임'을 직접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조선광문회가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지 이를 논증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견해가 당시로서는 달리 논증의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는 '일반적이고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1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현시점에서는 이를 별도로 논증해야 하므로 이 점은 뒤에서 자세히 논의하기로 하겠다.
한편 위의 서문 중 '[여지고]의 산경'이라는 표현은 용어 사용 면에서 다소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에는 [산천](山川)이라는 내제(內題)가 있고 신경준의 또 다른 저작이면서 같은 내용인 『산수고』에는 [산경](山經)이라는 내제(편목, 하위목차)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는, '[여지고]의 [산천]'은 책의 내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적 성격으로, 서문에서 말하는 '[여지고]의 산경'이란 '[여지고]에서 기술한 산경', 곧 '산의 줄기 幹 와 갈래 派 의 내력'을 기술한 '[산천]의 내용'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로 각각 이해하면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2. 박용수는 1769년 신경준이 영조의 명을 받아 『여지편람』을 감수 편찬했다는 점과 건 곤 2책으로 된 『여지편람』(필사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소장, 이하 장서각본이라 함) 중 건책(乾冊)의 내제(內題)가 『산경표』라는 점을 들어, "『여지편람』의 건책이 바로 현재 전하는 『산경표』의 원전이며, 『산경표』의 저자는 신경준이며, 편찬시기는 1769년"이라고 단정하였다.(『산경표』, 푸른산, 1990)
3. 일찍이 『산경표』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이우형은 『산경표』의 한북정맥 추모현(追慕峴)에 '영종 45년'(1769)이라는 연대를 부기(附記)하고 있는 점, 여암(旅庵) 신경준이 1781년에 타계한 점, 장서각본 『여지편람』의 곤책(坤冊) 『거경정리표』(距京程里表)에는 정조 20년(1796)에 완공된 '화성'(華城. 수원)이 실려 있는 점 등을 적시(摘示)하고, "『산경표』의 출현 시기는 1800년 전후로, 찬표자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였다.([백두대간이란 무엇인가], 월간 『산』, 1993. 6월호)
4. 양보경은 "일본 정가당 문고(靜嘉堂文庫)에 전하고 있는 같은 제목의 『여지편람』은 전혀 다른 내용의 6책으로 된 조선 지도책"임을 밝히면서, "내용은 다르나 이름이 같은 책이 있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영조가 『동국문헌비고』의 편찬 과정을 설명하면서 '『여지편람』의 범례가 중국의 『문헌통고』와 비슷하다'고 언급하였으나 장서각본 『여지편람』은 (『산경표』와) 『도리표』(道里表·『정리표』)로서 『문헌통고』와는 체제가 다른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장서각본 『여지편람』을 영조가 신경준에게 감수를 맡겼던 책으로 추정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으므로 좀더 신중히 검토할 것"을 주문하였고,([조선시대의 자연인식 체계], 『한국사 시민강좌』 제14집, 일조각, 1994) "『산경표』에는 19세기초에 변화된 지명이 기재되어 있고 『문헌비고』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저자를 신경준으로 단정하기 어려우나, 『산경표』가 신경준이 편찬한 『산수고』와 『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바탕으로 하여 작성된 것임은 분명하다."고 하였다.([여암 신경준의 지리사상], 『월간국토』 1999년 5월호)
5. 노상복은 "『여지편람』은 저자도 필사년대도 없으며 편찬과정이 소개된 서발문(序跋文) 등은 더구나 없다. 이 책의 곤부인 『정리표』의 내용이나 그 체제가 고종 때 오횡묵(吳宖默)이 편찬한 『여재촬요』(輿載撮要, 1894)의 『팔도도리표』(八道途里表)의 요약이라는 증빙만으로도 1895년 이후에 편집된 것임을 알 수 있고, 조선광문회본 『산경표』는 그 건부 『산경표』를 대본으로 발간한 것"이라고 하였다.(『장서각도서한국본해제집』 지리류(1), 1993 ; 『장서각도서해제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이상으로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의 서문과, 『산경표』의 편찬자와 편찬시기 및 원전에 관한 대표적인 견해들을 살펴보았다. 조선광문회·이우형·양보경의 견해가 비교적 서로 근접해 있는 데 비해 박용수는 시기를 다소 올려 잡았으며 노상복은 너무 늦추어 잡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떤 문헌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구명(究明)하는 일은 뚜렷한 문헌적 근거를 제시하고 논리적 타당성을 가질 때 비로소 과학적 학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확립된 학문적 성과로부터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사실을 잣대로 삼아 이와 관련된 또 다른 특정 사안을 검토함으로써 새로운 사실을 추정해 나갈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산경표』의 편자와 연대 및 원전에 대한 논의 또한 『산경표』의 내용 중에서 역사·문화·정치 등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사항을 찾아내고, 그것을 이미 일반화되고 보편화된 기존의 역사·문화적 사실과 비교 검토함으로써 어느 정도 새로운 사실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산경표』의 편자 등을 논의함에 있어서도 몇 가지 미리 전제(前提)해 두어야 할 사항이 있다. 첫째로 『동국문헌비고』는 영조 46년(1770)에 간행되었고 그 가운데 [여지고]는 신경준이 저술했다는 점, 둘째로 현재 전하고 있는 『산경표』가 최초의 『산경표』로부터 전사(轉寫)를 거듭하는 동안 사본 작성자가 임의로 그 내용을 변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제 『산경표』의 내용 중 중요한 사항 몇 가지와 관련 문헌들을 좀더 세밀히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첫째, 조선광문회본 『산경표』 99쪽 혈 頁 호남정맥 지래산(知來山) 갈래의 주석에 『문헌비고』를 거론하고 있다.
"『문헌비고』 본문을 살펴보면 가야산과 금전산 사이에 '초암산 한 갈래가 동남쪽으로 지래산 망주산 간둔산에 이른다'고 하였는데, 초암산이 혹 이 주월산 이하 3산의 별명인지, 혹 이 3산 외에 또 다른 산이 하나 있음에도 본문에서 빠뜨린 것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우선 지래산 이하의 모든 산이름을 이곳에 적는다."(按文獻備考本文 伽倻金錢之間 有'草巖山一麓東南至知來望主看屯山'則 草巖惑是舟越以下三山之別名 惑是三山之外自有一山而 本文漏之歟今幷未可知 故姑錄知來以下諸山于此)
이처럼 『산경표』에 『문헌비고』가 직접 거론되어 있다는 사실과, 그 내용을 확인해 보는 것만으로도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위의 『문헌비고』는 다름 아닌 『동국문헌비고』이다. 우리나라에서 『문헌비고』라는 이름으로 간행된 최초의 서적은 『동국문헌비고』이고, '초암산 한 갈래가 동남쪽으로 지래산 망주산 간둔산에 이른다'는 부분은 『동국문헌비고』 중 [여지고]의 [산천 총설1] 본문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주석은 『산경표』를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보고 만들었다는 것을 직접 밝히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동국문헌비고』는 영조 47년(1770)에 편찬되었으므로 『산경표』가 출현할 수 있는 시기는 최소한 1770년 이후이다. 그리고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신경준이 저술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신경준이 『문헌비고』([여지고])의 오류를 지적하는 글을 자신의 또 다른 책에 썼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신경준은 [여지고]를 저술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직접 『산경표』를 만든 것으로는 볼 수 없다.
둘째, 조선광문회본 『산경표』 62쪽 한북정맥 추모현(追慕峴)에 '본명은 사현이다. 영종 45년에 개명하였다.'(本名沙峴 英宗四十五年改名)고 부기하고 있다.
'영종'(英宗)은 '영조'(英祖 : 1694∼1776, 재위 : 1724∼1776)의 원 묘호(廟號)이며, 영종 45년은 서기 1769년이다. 영조는 재위 52년(1776. 3. 5·병자)에 83세를 일기로 타계하였고, 같은 해 3월 10일(신사)에 묘호를 '영종'이라 하였으며, 고종 27년(1890. 1. 5)에 '영조'(英祖)로 추존(追尊) 개정(改定)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조 21대 임금을 공식적으로 '영종' 또는 '영조'로 부르거나 기록할 수 있었던 시기는 각각 1776년과 1890년 이후이다. 따라서 『산경표』의 최초 출현 시기는 자연스럽게 1776년 이후로 미루어진다.
셋째, 조선광문회본 『산경표』는 1776∼1800년에 개칭된 행정구역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정조 즉위년(1776. 5. 22·임진)에 평안도 이산(理山)을 초산(楚山)으로, 충청도의 이산(尼山)을 이성(尼城)으로 각각 개칭했고, 순조 즉위년(1800. 8. 20·경오)에는 함경도 이성(利城)을 이원(利原)으로, 앞의 충청도 이성(尼城)을 다시 노성(魯城)으로 각각 개칭한 바 있다.
그런데 『산경표』는 초산(楚山 38쪽 자현 磁峴)과 이성(尼城 91쪽 노산 魯山)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고, 개칭 이전의 이성(利城 8쪽 궐파산 蕨坡山)과 개칭 후의 이원(利原 9쪽 좌역령 佐驛嶺)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으며, 같은 1800년에 개칭된 노성(魯城)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조선광문회가 최성우 소장본을 대본으로 삼아 『산경표』를 활자화하면서 전혀 오탈자 없이 옮겼으리라고 가정한다면, 최성우 소장본 『산경표』는 지명이 개칭된 1800년 이후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점과 개칭 이전에 출간된 문헌을 저본(底本)으로 삼았을 것이라는 점을 동시에 알 수 있다. 또 신경준은 1781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1800년에 개칭된 이원(利原)이라는 지명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산경표』의 편자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
넷째, 『산경표』는 [여지고]의 [산천 총설1]과 전면적으로 일치한다. 『동국문헌비고』는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없으나, 대신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를 통하여 『동국문헌비고』 중 [여지고]의 본모습을 상고해 볼 수 있다. 증보된 부분과 시대변천에 따라 추가된 부분에는 ' (補), (續)'과 같은 표지를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여지고]는 3차에 걸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1770), 『증정문헌비고』(1831, 미간행), 『증보문헌비고』(1908)에 공통적으로 [상위고]에 이어 두 번째(제2고)로 실려 있는 지리 분야에 관한 저술이다. 원래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는 17권(권6∼22)이었는데 『증보문헌비고』에서는 27권(권13∼39)으로 늘어났다. [역대국계], [군현연혁], [산천], [도리], [관방], [간도강계], [궁실] 등 7개의 하위목차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궁실]은 『증정문헌비고』를 편찬할 때 추가되었던 [궁실고]이고, [간도강계]는 『증보문헌비고』를 편찬할 때 추가되었다.
[산천]은 모두 5권(권7∼11)이며, 각각 [산천1](총설1 산 山), [산천2](총설2 천 川), [산천3](한성부, 경기도, 충청도), [산천4](전라도, 경상도), [산천5](강원도, 황해도, 함경도, 평안도)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산천 총설1]의 내용은 산경(山經)이며, [산천 총설2]의 내용은 수경(水經)이다. 실제로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와 『증보문헌비고』 중 [여지고]의 [산천 총설1]을 대조해 보면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의 부분적인 오탈(誤脫)로 볼 수 있는 사항을 제외하고는 전면적으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산경표』는 [여지고]의 [산천 총설1]을 그대로 족보식으로 재편집하여 산줄기 幹 (대간 정간 정맥)와 갈래 派 를 구성하고, 각론에 해당하는 [산천3]∼[산천5]의 각 군현 조(條)에서 군현의 치소(治所)로부터 산에 이르는(간혹 산으로부터 치소에 이르는) 방향과 거리를 확인하여 산이름 옆에 부기함으로써 완성한 것이다. 일부 지명(산의 소재지)은 [관방 성곽 해방]을 인용하기도 했고, 산이름이나 부기할 행정구역 명칭이 누락된 부분도 일부 발견된다.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에 수록된 산·고개·일반지명은 모두 1,580개 항목이다. 그런데 『산경표』에는 산줄기와 갈래의 연결표지가 없거나 연결이 잘못된 것, 그리고 갈래표지가 없거나 갈래표지와 실제 등재된 갈래(산)의 수가 다른 것들이 있고, 65쪽 낙동정맥의 경우 산줄기 가운데 부분의 3개 항목이 공백으로 남아 있다. 이런 사례들은 최초의 『산경표』로부터 전사(轉寫)를 거듭하는 동안 표지(標識)와 지명(산이름)이 탈락되거나 위치가 달라진 것으로서, [산천 총설1]을 통하여 원래의 위치와 탈락된 지명 12개를 확인할 수 있다. 또 『산경표』를 만들 당시에 누락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지명 18개, [산천 총설1] 원문의 오류(누락)로 인한 것 3개 등을 합해 모두 33개를 『산경표』에 재구(再構) 보완(補完)할 수 있다. 그 밖에 『산경표』에는 원래 산이름 옆에 부기했던 행정구역 명칭이 전사 과정에서 별도의 항목으로 변전(變轉)된 것으로 확인되는 것 2개가 있어, 이를 가감하면 『산경표』의 지명(항목)은 모두 1,611개로 집계된다. 한편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에 같은 지명을 산(山)과 고개 嶺, 峴, 峙 2가지로 표기한 사례 10개, [총설1]과 군현 조(條)의 표기가 다르기 때문에 생긴 사례 42개, 지명의 성질을 잘못 파악한 사례 30개, 산이름의 표기가 (모양이 비슷한) 다른 글자로 변전된 사례 45개 등을 서로 비교 고증할 수 있다.
[산천 총설1]에는 『산경표』와 달리 대간·정간·정맥 등의 산줄기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산경표』의 산줄기는 근본적으로 [산천 총설1]의 문단(단락) 구성을 따라 설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산줄기 설정에 일부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산경표』를 작성한 사람이 착오를 일으킨 것인지 '산경'에 대한 인식을 달리한 것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1,580∼1,611개에 달하는 산·고개·일반지명을 어떤 기준으로 항목화하고 어떻게 줄기 幹 와 갈래 派 로 구분할 것인가 하는 시각을 제외하면 전면적으로 동일한 그림이 된다.
다섯째, 『산경표』는 [산천 총설 1] 특유의 문체를 사용하고 있고, 원문의 지명이 중복된 것을 인지한 흔적이 있고, 원문의 오류(누락)를 지적하거나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후에 증보된 사항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산경표』 50쪽에는 해서정맥의 마지막 지명을 '해옹지험( 甕之險)'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해옹지험'이란 [여지고]의 [산천 총설 1]에서 황해도 장연(長淵)의 장산 앞바다에 있는 '해옹암( 甕巖)'이라는 바위섬을 거론하면서 이 지역의 지형지세가 험난함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독특한 서술구조이지, 그 자체가 곧 지명은 아니다. [여지고]의 [관방(關防) 해방(海防)4] 황해도 장연(長淵) 조(條)에서 '해옹암'이라는 지명이 확인되며, 이를 "백여 길 장 丈] 되는 바위 두 개가 바다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데 곧 장산(長山)의 석맥(石脈)이 물 속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해옹암'은 『대동여지도』에서도 확인된다.
[산천 총설1]의 태백산∼속리산 단락 중 화산(華山 : 문경)의 갈래에도 재악산(宰嶽山, 함창 : 원문의 착오)이 있고 속리산∼장안산 단락 중 황령(黃嶺, 함창) 다음에도 재악산(宰嶽山, 함창)이 있다. ⇒ 그런데 『산경표』는 27쪽 속리산의 갈래인 황령 다음의 재악산(뒤의 것)만을 항목으로 등재하고, 26쪽 화산의 갈래에는 이를 항목으로 등재하지 않고 "'화산으로부터 동쪽으로 재악산에 이른다'고도 하였다."(一云自華山東爲宰岳)는 주석을 붙이고 있다. 이것은 원문에 산이름이 중복된 것을 발견하고 그 중 하나만을 항목으로 등재하고 다른 하나에는 위와 같은 주석을 붙인 것임을 확인해 준다. 이 주석은 [산천 총설1]의 "화산 한 갈래가 동쪽으로 재악산에 이르고 남쪽에 함창현치가 있다."(華山一麓東至宰嶽山南有咸昌縣治)는 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산천 총설1]의 내장산∼달마산 단락 중 가야산(伽倻山)·주월산(舟越山) 다음과, 금화산(金華山)·주로산(周路山)·금전산(金錢山) 앞에 초암산(草巖山)을 누락시킨 채로 그 하위단락에서 초암산으로부터 갈래치는 산이름들을 기술하였다. ⇒ 『산경표』는 98쪽 호남정맥(주월산과 금화산 사이)에 초암산을 등재하지 않고, 이 초암산으로부터 갈래치는 지래산 이하의 3산을 주로산 옆에서부터 내리 적은 후, 그 왼쪽에 "『문헌비고』 본문을 살펴보면 가야산과 금전산 사이에 '초암산 한 갈래가 …"라는 주석을 붙였다. '가야산과 금전산 사이'란 [산천 총설1] 원문에 가야산의 갈래·초암산의 갈래·금전산의 갈래 순으로 산의 갈래를 기술하고 있음을 일컫는 말이다.
[산천 총설1]의 태백산∼속리산 단락 중 전록산(轉祿山)과 천등산(天登山) 사이에 박달산(朴達山)을 누락시킨 상태로 그 하위단락에서 박달산으로부터 갈래치는 산이름들을 기술하였다. ⇒ 『산경표』 25쪽 백두대간 전록산과 천등산 사이에 박달산이 등재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원문의 오류(누락)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산천 총설1]의 내장산∼달마산 단락 중 무등산(無等山)의 갈래로 나한산(羅漢山)이 증보되었다. ⇒ 『산경표』 95쪽 호남정맥 무등산의 갈래에 나한산이 등재되어 있지 않다.
이런 점을 살펴볼 때, 『산경표』는 [여지고]의 [산천]을 보고 만든 것이되 증보되지 않은 상태인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보고 작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섯째, 장서각본 『여지편람』의 건책 『산경표』는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와 미세한 차이가 있을 뿐 내용과 체제 면에서 같은 책이다. 이 책에서도 『문헌비고』(50장 丈 앞면)라는 책이름, 영종(英宗) 45년(31장 뒷면)이라는 연대 표기, 1776년에 개칭된 초산(楚山, 19장 뒷면)과 이성(尼城, 46장 앞면)이라는 지명 등을 모두 사용하고 있다. 다만 1800년에 개칭된 이원(利原)과 노성(魯城)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의 대본이 된 최성우 소장본보다 다소 앞선 시기에 발생한 사본일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곤책 『정리표』까지 살펴보면 비록 시기적으로 앞선다 하더라도 1800년에 근접한 시기에 발생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곤책 『정리표』는 [거경정리표]와 [사방정리표]로 되어 있는데, [사방정리표]에는 정조 19년(1795)에 개칭된 시흥(始興, 2장 뒷면)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고, [거경정리표]에는 이를 종전의 금천(衿川, 11장 뒷면)으로 표기하는 한편, 정조 20년(1796)에 완공된 화성(華城 : 수원, 11장 뒷면)과 1800년에 개칭된 노성(魯城, 13장 앞면)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책과 곤책의 발생시기가 다를 수 있는데, 대개 건·곤 2책의 경우 먼저 건책이 만들어지고 연이어 곧 곤책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보면 별다른 잘못은 없을 것이다.
이상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장서각본 『여지편람』을 영조가 신경준에게 감수 편찬하게 했다는 『여지편람』으로는 볼 수 없다. 그리고 순조(1790∼1834) 재위연간(1800∼1834)과 그 이후에 신설되거나 변경된 행정구역 명칭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점과, '영종'을 '영조'로 추존 개정한 1890년 이후에는 '영조'라고 표기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여지편람』의 『산경표』가 1895년 이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 또한 없다고 판단된다.
한편 『증보문헌비고』 [권수](卷首)의 [영조조 어제 동국문헌비고 서](英祖朝御製東國文獻備考序)를 살펴보면, 영조가
"… 처음에 『강역지』로 인하여 『여지편람』을 편찬하라고 명하였는데, 그 범례를 들어보니 『문헌통고』에 가까우므로 그 이름을 『동국문헌비고』라 하도록 다시 명하였으니 소위 [여지]는 곧 그 가운데 한 가지일 따름이다. …"(… 初因彊域誌命纂輿地便覽 聞其凡例近於文獻通考 更命其名曰東國文獻備考 所謂輿地卽其一事也 …)라고 하였다.
그런데 장서각본 『여지편람』은 건 곤 2책으로 된 지리서이고 원나라의 마단림(馬簞臨)이 편찬한 『문헌통고』는 송나라 때의 법제 경제 등 모든 제도와 문물사(文物史)를 기록한 책(348권)으로서 내용과 체제가 전혀 다르며, 위 인용문의 내용으로 보아 『여지편람』이라는 책이 당시에 완성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또한 같은 『증보문헌비고』의 [예문고](藝文考) 여지류(輿地類) 조(條)에 신경준이 지은 책으로 『강계지』(疆界志)·『산수경』(山水經)·『도리고』(道里考) 등을 실으면서 『여지편람』은 싣지 않은 점, 『여암집』(旅庵集, 필사본, 8권 4책,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과 『여암전서』(旅庵全書, 경인문화사, 1976 : 신조선사, 1929, 석판본을 영인한 것) 등에도 실리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해 보면,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책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지편람』은 별도로 편찬(완성)된 책이라기보다는 [여지고] 또는 『동국문헌비고』의 초고(草稿)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상으로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의 내용 중 그 원전과 편자 및 연대를 상호 관련지어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로서, 『산경표』가 『문헌비고』를 직접 거론하고 있고, 그 인용문이 [여지고]의 [산천 총설1] 본문과 일치한다는 점, 영종 45년(英宗四十五年)이라는 연대를 부기하고 있는 점, 1776∼1800년에 개칭된 행정구역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점 등을 적시(摘示)하였다.
그리고 『산경표』와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대조해 보면 『산경표』는 [여지고]의 [산천 총설1]과 전면적으로 일치한다는 점, 『산경표』가 [산천 총설 1] 특유의 문체를 사용하고 있고, 원문의 지명이 중복된 것을 인지한 흔적이 있고, 원문의 오류를 지적하거나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후에 증보된 사항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등을 예를 들어 설명함으로써, 『산경표』는 증보되지 않은 상태인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보고 작성한 것임을 논증하였다.
또한 장서각본 『여지편람』의 건책 『산경표』는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와 내용과 체제 면에서 같은 책으로서, 『문헌비고』, 영종(英宗) 45년, 초산(楚山)·이성(尼城) 등을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증보문헌비고』의 [영조조 어제 동국문헌비고 서]의 내용과, 같은 책의 [예문고]·『여암집』·『여암전서』 등에 실리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영조가 신경준에게 편찬하게 했다는 『여지편람』으로는 볼 수 없으며, 당시의 『여지편람』은 [여지고] 또는 『동국문헌비고』의 초고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산경표』는 영조 46년(1770)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중 신경준이 집필한 [여지고]의 [산천]을 보고, 순조 즉위년(1800) 경에 누군가 만든 것이며, 편자는 알 수 없지만 신경준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추기(追記) : 이상은 필자의 졸저 『한글 산경표』에서 가려 뽑고 일부 내용을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종전에 『산경표』의 발생 시기를 '서기 1800년 이후'라고 한 것에서 한 걸음 물러나 '서기 1800년 경'으로 수정했습니다. 옛 것을 본받고 이를 전승·발전시키려는 노력은 과학적 시각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향후에도 새로운 문헌이 발굴되고, 이 논제에 대한 좀더 명확한 연구와 이해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 (02/6/16)
현 진 상
우리 것에 대한 눈뜸과 자연환경 보전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백두대간에 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요즘 논의하고 있는 백두대간은 『산경표』(山經表)라는 작은 책에 실린 이 땅의 산줄기 분류체계이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줄기 이름이다. 『산경표』는 우리나라의 산이 어디서 시작하여 어디로 흐르다가 어디서 끝나는지를 족보 형식으로 도표화(圖表化)한 책이다.
백두대간과 『산경표』가 점차 널리 알려지고 이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면서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서로 시각과 견해를 달리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산경표』를 언제 누가 만든 것인가 하는 논제 또한 그 중 하나이다. 이 글에서는 이와 관련한 견해를 몇 가지 살펴보고, 『산경표』 및 관련 문헌을 통해 실증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산경표』(山經表)는 『해동도리보』(海東道里譜), 『기봉방역지』(箕封方域誌), 『산리고』(山里攷, 이상 서울대학교 규장각), 『여지편람』(輿地便覽)(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해동산경』(海東山經, 국립중앙도서관)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된 책의 일부로서 {정리표}(程里表, 道里表)와 함께 전해온다. 모두가 한문으로 된 필사본이며, 필자와 연대를 밝히지 않았고 서문이나 발문도 싣지 않고 있다.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가 최성우(崔誠愚) 소장본을 대본(臺本)으로 1913년 2월 단행본으로 간행한 『산경표』(신연활자본)에는 "편찬자는 알 수 없다." 撰者 未考 고 하면서도 서문(해제)에서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여지고](輿地考)를 거론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지지를 가만히 살펴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 있지 않음을 지적하게 된다. 오직 신경준이 지은 [여지고]의 산경(山經)만이 그 줄기[幹]와 갈래[派]의 내력을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높이 솟아 어느 산을 이루고, 비껴 달리다가 어느 고개에 이르며, 굽이돌아 어느 고을을 둘러싸는지를 상세히 싣지 않은 것이 없기에, 이야말로 산의 조종을 알려 주는 표라 할 만하다. 산경을 바탕[綱]으로 삼고 옆에 이수(里數)를 조목[目]으로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범위와 경계를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 한눈에 알아볼 수 있으니, 원전으로 삼은 산경에 금상첨화일 뿐만 아니라 실로 지리가의 나침반[指南]이 될 만하다 하겠다."( 考東方地志論山者類多 摘拔其尤散亂無統 惟輿地考申景濬所撰 山經直 幹波來歷 高起爲某嶽橫馳爲某嶺 回抱爲某治無不詳載 寔爲導山之祖是表也 以山經爲綱而旁附里數目 而張之全區界境曉然爲指掌 非但爲原經之錦花 實爲地理家之一指南云爾)
위 조선광문회본 『산경표』 서문의 [여지고]는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가리킨다. 조선광문회는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신경준이 저술했다는 것과, 누군가 [여지고]를 보고 『산경표』를 만들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광문회가 그렇게 확신했다는 사실이 '『산경표』의 원전은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임'을 직접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조선광문회가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지 이를 논증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견해가 당시로서는 달리 논증의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는 '일반적이고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1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현시점에서는 이를 별도로 논증해야 하므로 이 점은 뒤에서 자세히 논의하기로 하겠다.
한편 위의 서문 중 '[여지고]의 산경'이라는 표현은 용어 사용 면에서 다소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에는 [산천](山川)이라는 내제(內題)가 있고 신경준의 또 다른 저작이면서 같은 내용인 『산수고』에는 [산경](山經)이라는 내제(편목, 하위목차)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는, '[여지고]의 [산천]'은 책의 내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적 성격으로, 서문에서 말하는 '[여지고]의 산경'이란 '[여지고]에서 기술한 산경', 곧 '산의 줄기 幹 와 갈래 派 의 내력'을 기술한 '[산천]의 내용'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로 각각 이해하면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2. 박용수는 1769년 신경준이 영조의 명을 받아 『여지편람』을 감수 편찬했다는 점과 건 곤 2책으로 된 『여지편람』(필사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소장, 이하 장서각본이라 함) 중 건책(乾冊)의 내제(內題)가 『산경표』라는 점을 들어, "『여지편람』의 건책이 바로 현재 전하는 『산경표』의 원전이며, 『산경표』의 저자는 신경준이며, 편찬시기는 1769년"이라고 단정하였다.(『산경표』, 푸른산, 1990)
3. 일찍이 『산경표』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이우형은 『산경표』의 한북정맥 추모현(追慕峴)에 '영종 45년'(1769)이라는 연대를 부기(附記)하고 있는 점, 여암(旅庵) 신경준이 1781년에 타계한 점, 장서각본 『여지편람』의 곤책(坤冊) 『거경정리표』(距京程里表)에는 정조 20년(1796)에 완공된 '화성'(華城. 수원)이 실려 있는 점 등을 적시(摘示)하고, "『산경표』의 출현 시기는 1800년 전후로, 찬표자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였다.([백두대간이란 무엇인가], 월간 『산』, 1993. 6월호)
4. 양보경은 "일본 정가당 문고(靜嘉堂文庫)에 전하고 있는 같은 제목의 『여지편람』은 전혀 다른 내용의 6책으로 된 조선 지도책"임을 밝히면서, "내용은 다르나 이름이 같은 책이 있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영조가 『동국문헌비고』의 편찬 과정을 설명하면서 '『여지편람』의 범례가 중국의 『문헌통고』와 비슷하다'고 언급하였으나 장서각본 『여지편람』은 (『산경표』와) 『도리표』(道里表·『정리표』)로서 『문헌통고』와는 체제가 다른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장서각본 『여지편람』을 영조가 신경준에게 감수를 맡겼던 책으로 추정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으므로 좀더 신중히 검토할 것"을 주문하였고,([조선시대의 자연인식 체계], 『한국사 시민강좌』 제14집, 일조각, 1994) "『산경표』에는 19세기초에 변화된 지명이 기재되어 있고 『문헌비고』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저자를 신경준으로 단정하기 어려우나, 『산경표』가 신경준이 편찬한 『산수고』와 『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바탕으로 하여 작성된 것임은 분명하다."고 하였다.([여암 신경준의 지리사상], 『월간국토』 1999년 5월호)
5. 노상복은 "『여지편람』은 저자도 필사년대도 없으며 편찬과정이 소개된 서발문(序跋文) 등은 더구나 없다. 이 책의 곤부인 『정리표』의 내용이나 그 체제가 고종 때 오횡묵(吳宖默)이 편찬한 『여재촬요』(輿載撮要, 1894)의 『팔도도리표』(八道途里表)의 요약이라는 증빙만으로도 1895년 이후에 편집된 것임을 알 수 있고, 조선광문회본 『산경표』는 그 건부 『산경표』를 대본으로 발간한 것"이라고 하였다.(『장서각도서한국본해제집』 지리류(1), 1993 ; 『장서각도서해제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이상으로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의 서문과, 『산경표』의 편찬자와 편찬시기 및 원전에 관한 대표적인 견해들을 살펴보았다. 조선광문회·이우형·양보경의 견해가 비교적 서로 근접해 있는 데 비해 박용수는 시기를 다소 올려 잡았으며 노상복은 너무 늦추어 잡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떤 문헌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구명(究明)하는 일은 뚜렷한 문헌적 근거를 제시하고 논리적 타당성을 가질 때 비로소 과학적 학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확립된 학문적 성과로부터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사실을 잣대로 삼아 이와 관련된 또 다른 특정 사안을 검토함으로써 새로운 사실을 추정해 나갈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산경표』의 편자와 연대 및 원전에 대한 논의 또한 『산경표』의 내용 중에서 역사·문화·정치 등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사항을 찾아내고, 그것을 이미 일반화되고 보편화된 기존의 역사·문화적 사실과 비교 검토함으로써 어느 정도 새로운 사실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산경표』의 편자 등을 논의함에 있어서도 몇 가지 미리 전제(前提)해 두어야 할 사항이 있다. 첫째로 『동국문헌비고』는 영조 46년(1770)에 간행되었고 그 가운데 [여지고]는 신경준이 저술했다는 점, 둘째로 현재 전하고 있는 『산경표』가 최초의 『산경표』로부터 전사(轉寫)를 거듭하는 동안 사본 작성자가 임의로 그 내용을 변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제 『산경표』의 내용 중 중요한 사항 몇 가지와 관련 문헌들을 좀더 세밀히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첫째, 조선광문회본 『산경표』 99쪽 혈 頁 호남정맥 지래산(知來山) 갈래의 주석에 『문헌비고』를 거론하고 있다.
"『문헌비고』 본문을 살펴보면 가야산과 금전산 사이에 '초암산 한 갈래가 동남쪽으로 지래산 망주산 간둔산에 이른다'고 하였는데, 초암산이 혹 이 주월산 이하 3산의 별명인지, 혹 이 3산 외에 또 다른 산이 하나 있음에도 본문에서 빠뜨린 것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우선 지래산 이하의 모든 산이름을 이곳에 적는다."(按文獻備考本文 伽倻金錢之間 有'草巖山一麓東南至知來望主看屯山'則 草巖惑是舟越以下三山之別名 惑是三山之外自有一山而 本文漏之歟今幷未可知 故姑錄知來以下諸山于此)
이처럼 『산경표』에 『문헌비고』가 직접 거론되어 있다는 사실과, 그 내용을 확인해 보는 것만으로도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위의 『문헌비고』는 다름 아닌 『동국문헌비고』이다. 우리나라에서 『문헌비고』라는 이름으로 간행된 최초의 서적은 『동국문헌비고』이고, '초암산 한 갈래가 동남쪽으로 지래산 망주산 간둔산에 이른다'는 부분은 『동국문헌비고』 중 [여지고]의 [산천 총설1] 본문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주석은 『산경표』를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보고 만들었다는 것을 직접 밝히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동국문헌비고』는 영조 47년(1770)에 편찬되었으므로 『산경표』가 출현할 수 있는 시기는 최소한 1770년 이후이다. 그리고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신경준이 저술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신경준이 『문헌비고』([여지고])의 오류를 지적하는 글을 자신의 또 다른 책에 썼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신경준은 [여지고]를 저술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직접 『산경표』를 만든 것으로는 볼 수 없다.
둘째, 조선광문회본 『산경표』 62쪽 한북정맥 추모현(追慕峴)에 '본명은 사현이다. 영종 45년에 개명하였다.'(本名沙峴 英宗四十五年改名)고 부기하고 있다.
'영종'(英宗)은 '영조'(英祖 : 1694∼1776, 재위 : 1724∼1776)의 원 묘호(廟號)이며, 영종 45년은 서기 1769년이다. 영조는 재위 52년(1776. 3. 5·병자)에 83세를 일기로 타계하였고, 같은 해 3월 10일(신사)에 묘호를 '영종'이라 하였으며, 고종 27년(1890. 1. 5)에 '영조'(英祖)로 추존(追尊) 개정(改定)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조 21대 임금을 공식적으로 '영종' 또는 '영조'로 부르거나 기록할 수 있었던 시기는 각각 1776년과 1890년 이후이다. 따라서 『산경표』의 최초 출현 시기는 자연스럽게 1776년 이후로 미루어진다.
셋째, 조선광문회본 『산경표』는 1776∼1800년에 개칭된 행정구역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정조 즉위년(1776. 5. 22·임진)에 평안도 이산(理山)을 초산(楚山)으로, 충청도의 이산(尼山)을 이성(尼城)으로 각각 개칭했고, 순조 즉위년(1800. 8. 20·경오)에는 함경도 이성(利城)을 이원(利原)으로, 앞의 충청도 이성(尼城)을 다시 노성(魯城)으로 각각 개칭한 바 있다.
그런데 『산경표』는 초산(楚山 38쪽 자현 磁峴)과 이성(尼城 91쪽 노산 魯山)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고, 개칭 이전의 이성(利城 8쪽 궐파산 蕨坡山)과 개칭 후의 이원(利原 9쪽 좌역령 佐驛嶺)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으며, 같은 1800년에 개칭된 노성(魯城)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조선광문회가 최성우 소장본을 대본으로 삼아 『산경표』를 활자화하면서 전혀 오탈자 없이 옮겼으리라고 가정한다면, 최성우 소장본 『산경표』는 지명이 개칭된 1800년 이후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점과 개칭 이전에 출간된 문헌을 저본(底本)으로 삼았을 것이라는 점을 동시에 알 수 있다. 또 신경준은 1781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1800년에 개칭된 이원(利原)이라는 지명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산경표』의 편자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
넷째, 『산경표』는 [여지고]의 [산천 총설1]과 전면적으로 일치한다. 『동국문헌비고』는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없으나, 대신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를 통하여 『동국문헌비고』 중 [여지고]의 본모습을 상고해 볼 수 있다. 증보된 부분과 시대변천에 따라 추가된 부분에는 ' (補), (續)'과 같은 표지를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여지고]는 3차에 걸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1770), 『증정문헌비고』(1831, 미간행), 『증보문헌비고』(1908)에 공통적으로 [상위고]에 이어 두 번째(제2고)로 실려 있는 지리 분야에 관한 저술이다. 원래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는 17권(권6∼22)이었는데 『증보문헌비고』에서는 27권(권13∼39)으로 늘어났다. [역대국계], [군현연혁], [산천], [도리], [관방], [간도강계], [궁실] 등 7개의 하위목차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궁실]은 『증정문헌비고』를 편찬할 때 추가되었던 [궁실고]이고, [간도강계]는 『증보문헌비고』를 편찬할 때 추가되었다.
[산천]은 모두 5권(권7∼11)이며, 각각 [산천1](총설1 산 山), [산천2](총설2 천 川), [산천3](한성부, 경기도, 충청도), [산천4](전라도, 경상도), [산천5](강원도, 황해도, 함경도, 평안도)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산천 총설1]의 내용은 산경(山經)이며, [산천 총설2]의 내용은 수경(水經)이다. 실제로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와 『증보문헌비고』 중 [여지고]의 [산천 총설1]을 대조해 보면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의 부분적인 오탈(誤脫)로 볼 수 있는 사항을 제외하고는 전면적으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산경표』는 [여지고]의 [산천 총설1]을 그대로 족보식으로 재편집하여 산줄기 幹 (대간 정간 정맥)와 갈래 派 를 구성하고, 각론에 해당하는 [산천3]∼[산천5]의 각 군현 조(條)에서 군현의 치소(治所)로부터 산에 이르는(간혹 산으로부터 치소에 이르는) 방향과 거리를 확인하여 산이름 옆에 부기함으로써 완성한 것이다. 일부 지명(산의 소재지)은 [관방 성곽 해방]을 인용하기도 했고, 산이름이나 부기할 행정구역 명칭이 누락된 부분도 일부 발견된다.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에 수록된 산·고개·일반지명은 모두 1,580개 항목이다. 그런데 『산경표』에는 산줄기와 갈래의 연결표지가 없거나 연결이 잘못된 것, 그리고 갈래표지가 없거나 갈래표지와 실제 등재된 갈래(산)의 수가 다른 것들이 있고, 65쪽 낙동정맥의 경우 산줄기 가운데 부분의 3개 항목이 공백으로 남아 있다. 이런 사례들은 최초의 『산경표』로부터 전사(轉寫)를 거듭하는 동안 표지(標識)와 지명(산이름)이 탈락되거나 위치가 달라진 것으로서, [산천 총설1]을 통하여 원래의 위치와 탈락된 지명 12개를 확인할 수 있다. 또 『산경표』를 만들 당시에 누락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지명 18개, [산천 총설1] 원문의 오류(누락)로 인한 것 3개 등을 합해 모두 33개를 『산경표』에 재구(再構) 보완(補完)할 수 있다. 그 밖에 『산경표』에는 원래 산이름 옆에 부기했던 행정구역 명칭이 전사 과정에서 별도의 항목으로 변전(變轉)된 것으로 확인되는 것 2개가 있어, 이를 가감하면 『산경표』의 지명(항목)은 모두 1,611개로 집계된다. 한편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에 같은 지명을 산(山)과 고개 嶺, 峴, 峙 2가지로 표기한 사례 10개, [총설1]과 군현 조(條)의 표기가 다르기 때문에 생긴 사례 42개, 지명의 성질을 잘못 파악한 사례 30개, 산이름의 표기가 (모양이 비슷한) 다른 글자로 변전된 사례 45개 등을 서로 비교 고증할 수 있다.
[산천 총설1]에는 『산경표』와 달리 대간·정간·정맥 등의 산줄기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산경표』의 산줄기는 근본적으로 [산천 총설1]의 문단(단락) 구성을 따라 설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산줄기 설정에 일부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산경표』를 작성한 사람이 착오를 일으킨 것인지 '산경'에 대한 인식을 달리한 것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1,580∼1,611개에 달하는 산·고개·일반지명을 어떤 기준으로 항목화하고 어떻게 줄기 幹 와 갈래 派 로 구분할 것인가 하는 시각을 제외하면 전면적으로 동일한 그림이 된다.
다섯째, 『산경표』는 [산천 총설 1] 특유의 문체를 사용하고 있고, 원문의 지명이 중복된 것을 인지한 흔적이 있고, 원문의 오류(누락)를 지적하거나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후에 증보된 사항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산경표』 50쪽에는 해서정맥의 마지막 지명을 '해옹지험( 甕之險)'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해옹지험'이란 [여지고]의 [산천 총설 1]에서 황해도 장연(長淵)의 장산 앞바다에 있는 '해옹암( 甕巖)'이라는 바위섬을 거론하면서 이 지역의 지형지세가 험난함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독특한 서술구조이지, 그 자체가 곧 지명은 아니다. [여지고]의 [관방(關防) 해방(海防)4] 황해도 장연(長淵) 조(條)에서 '해옹암'이라는 지명이 확인되며, 이를 "백여 길 장 丈] 되는 바위 두 개가 바다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데 곧 장산(長山)의 석맥(石脈)이 물 속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해옹암'은 『대동여지도』에서도 확인된다.
[산천 총설1]의 태백산∼속리산 단락 중 화산(華山 : 문경)의 갈래에도 재악산(宰嶽山, 함창 : 원문의 착오)이 있고 속리산∼장안산 단락 중 황령(黃嶺, 함창) 다음에도 재악산(宰嶽山, 함창)이 있다. ⇒ 그런데 『산경표』는 27쪽 속리산의 갈래인 황령 다음의 재악산(뒤의 것)만을 항목으로 등재하고, 26쪽 화산의 갈래에는 이를 항목으로 등재하지 않고 "'화산으로부터 동쪽으로 재악산에 이른다'고도 하였다."(一云自華山東爲宰岳)는 주석을 붙이고 있다. 이것은 원문에 산이름이 중복된 것을 발견하고 그 중 하나만을 항목으로 등재하고 다른 하나에는 위와 같은 주석을 붙인 것임을 확인해 준다. 이 주석은 [산천 총설1]의 "화산 한 갈래가 동쪽으로 재악산에 이르고 남쪽에 함창현치가 있다."(華山一麓東至宰嶽山南有咸昌縣治)는 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산천 총설1]의 내장산∼달마산 단락 중 가야산(伽倻山)·주월산(舟越山) 다음과, 금화산(金華山)·주로산(周路山)·금전산(金錢山) 앞에 초암산(草巖山)을 누락시킨 채로 그 하위단락에서 초암산으로부터 갈래치는 산이름들을 기술하였다. ⇒ 『산경표』는 98쪽 호남정맥(주월산과 금화산 사이)에 초암산을 등재하지 않고, 이 초암산으로부터 갈래치는 지래산 이하의 3산을 주로산 옆에서부터 내리 적은 후, 그 왼쪽에 "『문헌비고』 본문을 살펴보면 가야산과 금전산 사이에 '초암산 한 갈래가 …"라는 주석을 붙였다. '가야산과 금전산 사이'란 [산천 총설1] 원문에 가야산의 갈래·초암산의 갈래·금전산의 갈래 순으로 산의 갈래를 기술하고 있음을 일컫는 말이다.
[산천 총설1]의 태백산∼속리산 단락 중 전록산(轉祿山)과 천등산(天登山) 사이에 박달산(朴達山)을 누락시킨 상태로 그 하위단락에서 박달산으로부터 갈래치는 산이름들을 기술하였다. ⇒ 『산경표』 25쪽 백두대간 전록산과 천등산 사이에 박달산이 등재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원문의 오류(누락)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산천 총설1]의 내장산∼달마산 단락 중 무등산(無等山)의 갈래로 나한산(羅漢山)이 증보되었다. ⇒ 『산경표』 95쪽 호남정맥 무등산의 갈래에 나한산이 등재되어 있지 않다.
이런 점을 살펴볼 때, 『산경표』는 [여지고]의 [산천]을 보고 만든 것이되 증보되지 않은 상태인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보고 작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섯째, 장서각본 『여지편람』의 건책 『산경표』는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와 미세한 차이가 있을 뿐 내용과 체제 면에서 같은 책이다. 이 책에서도 『문헌비고』(50장 丈 앞면)라는 책이름, 영종(英宗) 45년(31장 뒷면)이라는 연대 표기, 1776년에 개칭된 초산(楚山, 19장 뒷면)과 이성(尼城, 46장 앞면)이라는 지명 등을 모두 사용하고 있다. 다만 1800년에 개칭된 이원(利原)과 노성(魯城)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의 대본이 된 최성우 소장본보다 다소 앞선 시기에 발생한 사본일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곤책 『정리표』까지 살펴보면 비록 시기적으로 앞선다 하더라도 1800년에 근접한 시기에 발생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곤책 『정리표』는 [거경정리표]와 [사방정리표]로 되어 있는데, [사방정리표]에는 정조 19년(1795)에 개칭된 시흥(始興, 2장 뒷면)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고, [거경정리표]에는 이를 종전의 금천(衿川, 11장 뒷면)으로 표기하는 한편, 정조 20년(1796)에 완공된 화성(華城 : 수원, 11장 뒷면)과 1800년에 개칭된 노성(魯城, 13장 앞면)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책과 곤책의 발생시기가 다를 수 있는데, 대개 건·곤 2책의 경우 먼저 건책이 만들어지고 연이어 곧 곤책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보면 별다른 잘못은 없을 것이다.
이상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장서각본 『여지편람』을 영조가 신경준에게 감수 편찬하게 했다는 『여지편람』으로는 볼 수 없다. 그리고 순조(1790∼1834) 재위연간(1800∼1834)과 그 이후에 신설되거나 변경된 행정구역 명칭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점과, '영종'을 '영조'로 추존 개정한 1890년 이후에는 '영조'라고 표기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여지편람』의 『산경표』가 1895년 이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 또한 없다고 판단된다.
한편 『증보문헌비고』 [권수](卷首)의 [영조조 어제 동국문헌비고 서](英祖朝御製東國文獻備考序)를 살펴보면, 영조가
"… 처음에 『강역지』로 인하여 『여지편람』을 편찬하라고 명하였는데, 그 범례를 들어보니 『문헌통고』에 가까우므로 그 이름을 『동국문헌비고』라 하도록 다시 명하였으니 소위 [여지]는 곧 그 가운데 한 가지일 따름이다. …"(… 初因彊域誌命纂輿地便覽 聞其凡例近於文獻通考 更命其名曰東國文獻備考 所謂輿地卽其一事也 …)라고 하였다.
그런데 장서각본 『여지편람』은 건 곤 2책으로 된 지리서이고 원나라의 마단림(馬簞臨)이 편찬한 『문헌통고』는 송나라 때의 법제 경제 등 모든 제도와 문물사(文物史)를 기록한 책(348권)으로서 내용과 체제가 전혀 다르며, 위 인용문의 내용으로 보아 『여지편람』이라는 책이 당시에 완성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또한 같은 『증보문헌비고』의 [예문고](藝文考) 여지류(輿地類) 조(條)에 신경준이 지은 책으로 『강계지』(疆界志)·『산수경』(山水經)·『도리고』(道里考) 등을 실으면서 『여지편람』은 싣지 않은 점, 『여암집』(旅庵集, 필사본, 8권 4책,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과 『여암전서』(旅庵全書, 경인문화사, 1976 : 신조선사, 1929, 석판본을 영인한 것) 등에도 실리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해 보면,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책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지편람』은 별도로 편찬(완성)된 책이라기보다는 [여지고] 또는 『동국문헌비고』의 초고(草稿)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상으로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의 내용 중 그 원전과 편자 및 연대를 상호 관련지어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로서, 『산경표』가 『문헌비고』를 직접 거론하고 있고, 그 인용문이 [여지고]의 [산천 총설1] 본문과 일치한다는 점, 영종 45년(英宗四十五年)이라는 연대를 부기하고 있는 점, 1776∼1800년에 개칭된 행정구역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점 등을 적시(摘示)하였다.
그리고 『산경표』와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대조해 보면 『산경표』는 [여지고]의 [산천 총설1]과 전면적으로 일치한다는 점, 『산경표』가 [산천 총설 1] 특유의 문체를 사용하고 있고, 원문의 지명이 중복된 것을 인지한 흔적이 있고, 원문의 오류를 지적하거나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후에 증보된 사항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등을 예를 들어 설명함으로써, 『산경표』는 증보되지 않은 상태인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보고 작성한 것임을 논증하였다.
또한 장서각본 『여지편람』의 건책 『산경표』는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와 내용과 체제 면에서 같은 책으로서, 『문헌비고』, 영종(英宗) 45년, 초산(楚山)·이성(尼城) 등을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증보문헌비고』의 [영조조 어제 동국문헌비고 서]의 내용과, 같은 책의 [예문고]·『여암집』·『여암전서』 등에 실리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영조가 신경준에게 편찬하게 했다는 『여지편람』으로는 볼 수 없으며, 당시의 『여지편람』은 [여지고] 또는 『동국문헌비고』의 초고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산경표』는 영조 46년(1770)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중 신경준이 집필한 [여지고]의 [산천]을 보고, 순조 즉위년(1800) 경에 누군가 만든 것이며, 편자는 알 수 없지만 신경준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추기(追記) : 이상은 필자의 졸저 『한글 산경표』에서 가려 뽑고 일부 내용을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종전에 『산경표』의 발생 시기를 '서기 1800년 이후'라고 한 것에서 한 걸음 물러나 '서기 1800년 경'으로 수정했습니다. 옛 것을 본받고 이를 전승·발전시키려는 노력은 과학적 시각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향후에도 새로운 문헌이 발굴되고, 이 논제에 대한 좀더 명확한 연구와 이해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 (0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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